페이지 정보
- 저자/책명
- 김려/장미와 나르시스와 전지가위
- 출판사/년도
- 걷는사람/25. 12. 15.
본문
책 소개
상처를 건너뛰지 않고, 그 흔적 곁에 머문다.
회복을 말하지 않는 자리에서 삶은 조용히 계속된다.
“우리는 금세 늙어 버릴 거라고 죽은 뒤에도 꼭 붙어 있을 거라고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 윙크하는 나르, 나르”
김려의 시집 『장미와 나르시스와 전지가위』는 상실과 결핍 이후의 시간을 통과하는 존재의 감각을 정면에서 다룬다. 이 시집에서 시적 주체는 온전함이나 회복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훼손되고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고통을 제거하거나 극복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그 고통이 남긴 흔적과 정서를 끝까지 응시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핍을 존재론적 결여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시적 윤리로 이어진다. 고통은 삶의 바깥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로 자리한다. 시집 전체는 이 층위 위에서 존재를 지속하는 방식에 대한 사유로 전개되며, 그 사유는 감정의 고조보다는 차분한 성찰의 언어로 축적된다.
시집 전반에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대한 재인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김려는 무기력과 공허를 삶의 실패나 탈락으로 단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머무름의 상태를 하나의 생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나무와 씨앗, 동물과 사물의 이미지는 완결된 상징으로 기능하기보다, 방치되고 훼손된 존재의 상태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성장이나 구원의 서사로 수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음 자체가 삶의 지속 가능성을 환기한다. 취약한 존재는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그 불안정함을 견디는 태도가 시의 중심에 놓이며 시집의 정서를 형성한다.
이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위악적인 시적 태도다. 시인은 고통을 낭만화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 기대지 않기 위해 불편한 감각을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위악은 파괴를 향한 충동이 아니라, 희망의 허위를 경계하며 존재를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로 읽힌다. 삶의 불완전성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실에 대한 감각을 또렷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다. 이는 쉽게 위로하거나 구원을 말하지 않는 시적 윤리와 맞닿아 있다. 시집 전반에는 이러한 긴장된 태도가 일관되게 흐르며, 시적 주체의 정서적 균형을 떠받친다.
『장미와 나르시스와 전지가위』는 독자에게 즉각적인 위안이나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결핍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취약함을 인식하고, 그 상태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인다. 김려의 시는 상처를 극복한 이후의 삶이 아니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윤리를 묻는다. 고통을 삭제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언어의 힘이 이 시집의 핵심이다. 시인은 결핍된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망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그 균형 감각이 이 시집을 단단하게 지탱하며, 독자에게 오래 남는 사유의 여지를 남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715464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