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 저자/책명
- 김혜영 / 가면의 감정
- 출판사/년도
- 청색종이 / 2026
본문
책소개
가면의 틈에서 피어나는 애도의 언어
김혜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가면의 감정』이 출간되었다. 199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한 이후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다정한 사물들』 등을 통해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김혜영 시인의 시는 현실의 고통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이미지와 장면의 구성 속에서 변형하고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한층 깊어진 형태로 나타난다. 현실의 상처와 사회적 고통, 죽음과 애도의 문제를 끌어안으면서도 특유의 상상력과 개성적인 이미지를 잃지 않는다.
『가면의 감정』에는 죽음과 상실, 전쟁과 폭력, 차별과 노동, 가족의 균열과 세월의 고독 같은 무거운 현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정면으로 고발하거나 감정을 직접 토로하지 않는다. 현실은 다른 형상과 장면으로 옮겨지고, 상처는 이미지의 언어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또 다른 시적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익숙한 현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시집의 제목에 포함된 ‘가면’은 이러한 시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가면은 감정을 숨기기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불안, 결핍을 감춘 채 살아간다. 감정노동자는 미소를 연기하고, 가족은 사랑 속에 침묵을 감추며, 노동자는 고통을 견디고, 남겨진 사람들은 슬픔을 삼킨다. 『가면의 감정』의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속내를 직접 말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의 표면보다 그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감정의 흔적에 주목한다.
김혜영 시인의 시에는 현실의 감정과 갈등을 직접 말하는 대신 그것을 다른 존재와 장면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이 자주 나타난다.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감정의 과잉에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통은 이미지라는 우회로를 통과하며 애도의 언어로 변환된다. 이러한 형상화는 이번 시집에서 더욱 원숙한 형태로 나타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낙타가 되고, 가족의 은밀한 갈등은 외계인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현실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더 이상 현실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시인은 고통을 직접 진술하는 대신 다른 형상 속으로 옮겨 놓는다. 직접 말할 수 없는 감정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고, 상처는 새로운 얼굴을 얻는다.
이러한 시적 장치는 환상적 장식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기 위한 방식이다. 현실을 그대로 응시하는 일은 때로 너무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시인은 그 사이에서 또 다른 길을 선택한다. 상처를 지우지 않은 채 그것을 다른 이미지의 언어로 옮겨 놓는다. 이러한 상상력은 현실을 다시 살아내기 위한 힘이기도 하다.
「수련의 이별」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는 참혹한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죽은 아이가 부모를 위로하는 장면을 담아낸다. 「떨어지는 사람」에서는 산업재해로 추락한 청년이 북극의 오로라가 된다. 「무지개가 뜬 봄날에」에서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분홍치마를 입은 천사로 변한다. 이 변환의 과정에서 현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다. 다만 그것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슬픔과 애도의 언어로 독자 앞에 나타난다.
이 시집에는 유독 죽음이 많이 등장한다. 세월호 희생자, 산업재해 노동자, 노년의 어머니, 병사들. 그러나 죽음은 소멸로 끝나지 않는다. 사라진 존재들은 천사와 수련, 별빛과 오로라, 바람과 같은 다른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시인은 사라진 존재들을 다른 이름으로 다시 불러낸다.
시집 전체를 통틀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축은 모성이다. 군대에 간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 사춘기의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 노모를 돌보는 딸 등의 모습이 여러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시집의 모성은 혈연의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노숙인과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희생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상처를 바라보면서도 그들을 추상적인 사회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 시선에는 누군가를 돌보고 보듬으려는 정서가 배어 있으며, 개인의 슬픔은 타인의 고통과 공명하며 더 넓은 애도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가면의 감정』은 현실 비판의 시집이면서도 분노의 시집은 아니다. 오히려 연민의 시집에 가깝다. 시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들은 대부분 작고 낮고 약하다. 취업에 실패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감정노동자, 노숙인, 집 잃은 고양이, 꿀벌, 당나귀, 그림자 등.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쉽게 밀려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들의 패배를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기억되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기록한다.
『가면의 감정』에서 가면은 감정을 숨기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직접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얼굴에 가깝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을 정면으로 진술하는 대신 낙타와 외계인, 그림자와 천사, 수련과 오로라 같은 형상 속으로 옮겨 놓는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상처는 타인의 슬픔과 만나고, 개별적 경험은 더 넓은 공감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애도는 죽음을 붙드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을 다른 이름으로 다시 불러내는 일에 가깝다. 시인은 상실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기억의 언어로 변환하고, 현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가면의 감정』이라는 제목은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킨다. 가면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작고 연약한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을 끝내 애도의 언어로 바꾸어 내는 시의 힘을 보여 준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93406133>

